‘불편한 용기’ 마지막 시위 후 1년 만에 열린 여성 시위
여성혐오 폭력 속 세상 떠난 설리·구하라 사건 계기
거리 위 외침 1년 지났는데도 여혐 범죄 계속 돼
“강남역 살인사건, 여성 연예인 사망은 페미사이드”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열린 ‘페미사이드(Femicide) 철폐 시위’ 참가자들이 손바닥에 빨간색 물감을 묻히고 구호를 외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오연서 기자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열린 ‘페미사이드(Femicide) 철폐 시위’ 참가자들이 손바닥에 빨간색 물감을 묻히고 구호를 외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오연서 기자

 

28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 앞에 여성 1천500명(주최 쪽 추산)이 모였다. 검은 옷차림에 하얀 가면을 쓴 여성들은 길게 줄을 서 순서대로 자신의 손바닥에 빨간 물감을 묻혔다. “여성을 죽이지 말라!” 이들은 마로니에공원 옆 차도에 자리한 무대를 향해 붉은 손바닥을 펼치며 외쳤다.

 

지난 10월14일. 가수겸 배우 설리(본명 최진리·25)씨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 24일에는 그룹 카라의 멤버 구하라(28)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날 혜화역에 모인 여성들은 이들의 죽음을 ‘페미사이드’로 규정하며 이를 막을 대책을 촉구했다. 페미사이드는 여성(female)과 살해(homicide)를 합친 단어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해 등 강력범죄를 뜻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모인 여성들은 마로니에공원 앞 300m가량 이어지는 2개 차로를 메우고 ‘당신이 가해자다’ ‘STOP FEMICIDE’(페미사이드를 중단하라)라고 적힌 종이팻말을 들었다. 이날 집회는 생물학적 여성만 참가할 수 있었다.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열린 페미사이드(Femicide) 규탄 시위에서 가면을 쓴 시민들이 여성 혐오적 범죄를 규탄하고, 이를 막기 위한 정부의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페미사이드는 여성(Female)과 살해(Homicide)의 합성어다. 연합뉴스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열린 페미사이드(Femicide) 규탄 시위에서 가면을 쓴 시민들이 여성 혐오적 범죄를 규탄하고, 이를 막기 위한 정부의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페미사이드는 여성(Female)과 살해(Homicide)의 합성어다. 연합뉴스

 

혜화역에서 여성들의 참가만 허용하는 집회가 열린 건 지난해 12월 이후 1년 만이다. 지난해 5월 혜화역 일대에서는 홍대 불법촬영 사건 수사를 계기로 성별에 따라 불법촬영 사건 수사를 편파적으로 하는 현실을 규탄하는 ‘불편한 용기’ 시위가 열렸다. ‘혜화역 시위’로도 불렸던 이 시위는 지난해 12월22일 6차 시위를 끝으로 잠정 중단됐다. 이후 1년여 만에 ‘페미사이드를 근절하자’며 여성들이 거리에 다시 모인 것이다.

 

이처럼 여성들의 분노가 다시 피어오른 것은 최진리씨(예명 설리), 구하라씨 등 20대 여성 연예인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면서다. 주최 쪽은 성명문에서 “우리는 두명의 자매를 잃었다. 두명의 자매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죽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되는 범죄를 겪고, 쉽게 공격당했다. 우리는 이를 분명하게 페미사이드라고 명명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은 “그(구하라)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가수였지만, 여성이었기 때문에 불법촬영 영상 유포 협박의 대상이 되었다. 죄 지은 것 하나 없는 그는 재판부에게, 대중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2차 가해를 당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살해당했다. 그는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죽임당했다”고 덧붙였다.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페미사이드(Femicide) 철폐 시위’가 열렸다. 한 여성이 무대 위에 올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연서 기자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페미사이드(Femicide) 철폐 시위’가 열렸다. 한 여성이 무대 위에 올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연서 기자

 

“여자가 가해자면 6.9일 실검1위. 남자가 가해자면 실검에도 안 올라간다.” “여자가 가해자면 남성혐오 살인자고 남자가 가해자면 충동이고 홧김이냐.” 참가자들은 무대 위에 올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잔혹범죄가 끊이지 않는 사회를 규탄했다. 무대에 오른 참가자들은 “만지지마, 때리지마, 죽이지마, 강력처벌”,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입에도 담기 힘든 수많은 여혐단어”, “여혐단어 포화상태, 근절노력 해봤었냐” 등 구호를 외쳤다. 한 참가자는 “여러분 살아서 와줘서 고맙다. 우리 모두 죽지 말자”고 말해 참가자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기도 했다.

 

여성 대상 강력범죄의 심각성은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이들은 입장문에서 “대검찰청에서 공개한 ‘2018 범죄 분석’에 의하면 강력범죄(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의 여성 피해자 비율은 전체의 90%다. 최근 5년간 불법 촬영 범죄자의 86%는 집행유예·벌금형으로 풀려났다. 가부장폭력 신고건수는 해마다 늘어나는데, 검거율은 16.8%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명백히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폭행당하고, 살인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살해에 대한 심각성은 ‘일부의 사례’, ‘일부 정신질환자의 소행’이라며 극단의 경우 ‘피해자의 잘못’이라며 축소됐다”고 밝혔다.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페미사이드(Femicide) 철폐 시위’가 열렸다. 이번 시위는 죽은 여성들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은 검은 옷이 드레스코드였다. 오연서 기자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페미사이드(Femicide) 철폐 시위’가 열렸다. 이번 시위는 죽은 여성들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은 검은 옷이 드레스코드였다. 오연서 기자

 

분노한 여성들의 외침이 공허한 울림에 그친 현실에 대한 울분도 쏟아졌다. 이들은 성명문에서 “여성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범죄의 대상이 된다. 청소년의 성을 착취하는 동영상을 텔레그램을 통해 유포하는 ‘n번방’, 그리고 또래 남아에게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지만 보건복지부 장관이 나서서 이는 성폭행이 아니라고 했던 성남 어린이집 사건을 우리는 기억한다. 국가는 여성의 입을 막고 어린 아이들조차도 보호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페미사이드(Femicide) 철폐 시위’가 열렸다. 이번 시위는 죽은 여성들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은 검은 옷이 드레스코드였다. 주최 쪽 제공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페미사이드(Femicide) 철폐 시위’가 열렸다. 이번 시위는 죽은 여성들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은 검은 옷이 드레스코드였다. 주최 쪽 제공

 

해가 지고 날은 더 추워졌지만 시위 참가자들은 갈수록 늘었다. 참가자들은 군가 ‘진짜사나이’를 ‘여성으로 태어나서’로 개사해 “여성으로 태어나서 강요도 많다만 너와 나 여혐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불렀다. 더 이상의 페미사이드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의미를 담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하이드에게 살해된 여성 루시의 노래 ‘A new life’를 부르는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를 막기 위한 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문에서 △여성 대상 폭력의 법제화 △가부장폭력, 이성애 관계에서의 폭력에 대한 특별법 제정 △합당한 처벌과 피해자 회복을 지원하는 제도적 해결장치 마련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대통령의 실질적인 해결방안 마련 및 시행을 요구했다.